
우리는 흔히 100세 시대에 산다고 말한다. 삶의 총량은 늘어났고, 기회의 문은 넓어졌다고들 한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 숫자는 희망보다 압박으로 다가온다.
“이만큼이나 살았는데, 나는 왜 아직 여기에 있을까.”
이 위화감에는 이유가 있다. 우리가 무의식중에 설정한 **‘성장의 유효기간’**은 생물학적 수명보다 훨씬 짧기 때문이다. 경쟁하고, 성취하며, 정점을 향해 달리는 시간. 우리는 그 뜨거운 구간이 마흔이나 쉰 언저리에서 끝난다고 믿는다. 그 이후의 삶은 어쩐지 이미 기울기 시작한 풍경 같고, 여생(餘生)처럼 느껴지기에 우리는 습관적으로 남은 시간을 셈하게 된다.
“내 전성기는 이미 지나간 게 아닐까?”
이 질문은 곧 조급함이 되고, 조급함은 스스로를 갉아먹는다. 우리는 아주 어릴 때부터 속도전(速度戰)에 익숙해져 있다. 먼저 출발하고, 먼저 도착하고, 먼저 깃발을 꽂는 것만이 승리라고 배웠다. 그래서 앞서가는 이들의 등은 영영 닿을 수 없는 절벽처럼 보인다.
하지만 삶의 변화가 언제나 일정한 속도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살다 보면, 가장 빨랐던 사람이 가장 먼저 지쳐 멈추기도 하고 느리다고 여겼던 사람이 묵묵한 보폭으로 저 앞까지 나아가 있는 장면을 마주한다. 그런 장면을 떠올리면 지금의 속도로 이후의 시간을 모두 판단할 수는 없겠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기다리는 시간을 파도에 겹쳐본다. 성급하게 밀려온 앞선 파도는 요란하게 부서지지만, 고작 발목을 적실뿐이다. 하지만 그 뒤에서 호흡을 고르며 천천히 밀려오는 파도는 다르다. 그들은 앞선 파도들이 남긴 물길을 타고, 소리 없이 거대하게 밀려와 해변의 가장 마른 곳까지 깊숙이 덮어버린다.
지금 속도가 나지 않는다고 해서 멈춘 것은 아니다. 어쩌면 이 시간은, 얄팍하게 부서지는 파도가 아니라 가장 멀리까지 닿기 위해 힘을 모으고 있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지금의 속도로 앞으로 닿을 곳까지 모두 정해버리지는 말자. 늦게 오는 파도에도 적실 해변이 남아 있을 것이다. 조급한 날이면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음 걸음을 이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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